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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6.04.30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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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목사.jpg

미리 참배한 5.18 민주묘지
 
엘리엇(T. S. Eliot)이 '황무지'란 시에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지요. 맞는 것 같습니다. 2년 전 맑디맑은 300 여 명의 어린 아이들을 수장시킨 세월호 침몰 참사가 있었던 달이 4월 16일이었지요. 불의에 항거해 청년 학도들이 목숨 걸고 싸운 4.19가 일어난 달도 역시 4월 19일이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4월은 충분히 잔인한 달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음험한 마음으로 소수의 군인 무리들이 5.18 민주항쟁을 총칼로 진압하려고 모의한 달이어서 더 잔인한 달 4월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980년 5월 18일,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으로 공수특전단이 광주에 투입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는 5월은 5.18 민중항쟁 36주년이 되는 달입니다.
 
산하는 그날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온통 짙푸르렀습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는 고시구(古詩句)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사는 경상북도 김천에서 광주 광역시 북구 민주로 200 국립5.18민주묘지까지 쉬지 않고 3시간을 달려야 했습니다. 4월 28일 오후 4시 30분, 정문에 도착하니 안내하는 직원이 반가이 맞아 주었습니다.
 
몇 가지를 직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묘지 문을 닫는 시각과 제가 찾고자 하는 묘지가 어디쯤 있는지?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 돌아보는 것이 효율적인지 등. 직원은 상세하게 안내해 주었습니다. 묘지 위치를 알려주었고, 문 닫는 시각이 정해져 있으니 추모관부터 들릴 것을 권했습니다. 고맙다고 인사한 뒤, 저는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무너뜨리려고 하는 민주주의 온 몸으로 막겠습니다."
 
안내하는 직원이 특별히 우리 부부에게 동행하며 설명을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중히 고사했습니다. 평일이어서 한가하긴 했지만 그래도 참배객들이 여기저기 보여 우리 두 사람에게 매이는 게 부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의는 고맙게 받되 묘원은 스스로 둘러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30 여 년 전 우리 부부가 신혼여행을 이곳으로 왔었고, 그 뒤 지인들과 몇 번 참배를 했지만 올 때마다 새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먼저 묘지 왼쪽에 위치해 있는 5.18추모관으로 갔습니다. 2층으로 된 공간은 온통 슬픔과 억울함의 한(恨)으로 서려 있었습니다. 아니, 불의에 맨 몸으로 저항한 당당함이 녹아 있었습니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도 군사 독재에 신음하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5.18 영령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추모관 안은 이렇게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당시 희생된 165인의 영정이 말없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침묵의 길', 병풍 모양의 그래픽 패널로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있는 소년(80년 당시 4세였으니 이 소년도 지금은 불혹(不惑)의 중년이 되었으리라)의 모습이 담긴 '이 한 장의 사진', 2층 민주의 샘에서 흘러내린 물이 역사의 강을 타고 한 줄기 눈물 되어 모이는 것을 형상화한 '한 줄기 눈물', 5.18 민주화운동 관련 영상물을 상시 상영하는 '영상실'이 1층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또 5.18 민주화운동 전개과정을 1층과 2층에 걸쳐 전시해 놓은 '전시실'이 길게 펼쳐져 있고, 5.18 관련 서적 및 일반 도서들이 비치된 '자료실'은 궁금한 것을 찾아 읽을 수 있도록 탁상과 의자까지 친절하게 갖춰져 있었습니다. 2층의 자료실에는 유사한 민중 항쟁이 일어났던 동티모르 네팔 스리랑카 대만 미얀마 필리핀 등 여러 나라의 사건들d을 소개하는 책자들도 눈에 띄었습니다(이상 '국립5.18민주묘지' 안내 팜플릿 참조).
 
2층 '기획전시실'은 슬라이드 전시 벽을 이용한 특별 전시실인데 5.18민주항쟁 36주년을 맞이해서 판화가 홍성담의 '오월 판화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4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라고 하니까 시간을 내어 관람한다면 어두운 기억의 저 편을 읽어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5.18 민중항쟁에 대해 판화 등 미술, 그리고 음악 등 예술계에서 한 역할이 지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추모관을 나와 5.18 민중항쟁 추모탑 앞에서 분향하며 추모의 염(念)을 받쳤습니다. 시간에 쫓겨 꼼꼼히 살피지 못하고 몇 분 지인들의 묘지를 찾았습니다. 우리의 현대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뒤에 한겨레신문 사장 회장을 지낸 송건호 선생, 유신 독재 시절 필봉으로 젊은이들의 의식을 깨우치게 한 리영희 교수의 묘지를 찾아 먼저 머리 숙였습니다.
 
중앙대 교수로 서울민중연합 민족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한 유인호 교수, 보수교단인 중앙성결교회 장로이면서 사회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야 만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 한겨레신문 영업이사와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는 김태홍 선배 등 지인들의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묘지 옆 사진에서 그들을 대면하는 것 같은 착각을 왔습니다. 반갑게 맞아주는 것 같더군요. 자근자근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오후 6시 묘지 문을 닫을 시간입니다. 5.18 민중항쟁 26주년을 앞두고 준비에 직원들의 마음이 분주해 보였습니다. 묘지 곳곳에는 '보수 중'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입장할 땐 직원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사복으로 갈아입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 여직원이 더 예쁘게 보였습니다. 그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문을 나섰습니다. 우리 부부가 그날의 마지막 참배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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