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아그라 시내 관광
무굴제국 Mughal Empire(1526~1857)
1857년 영국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북인도에 존재하던 이슬람 왕조. 주요 영토는 인도 지역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발원지는 아프가니스탄이며, 초창기의 세력은 티무르 제국의 잔존 세력이다. 때문에 몇몇 서적에서는 이를 두고 제2차 티무르 제국이란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다.
▶초기
첫번째 황제 바부르[7]는 티무르의 자손이자[8] 모계로 징기스칸의 혈통[9] 을 잇는 인물로 본래 페르가나 지방을 지배하던 군주였는데, 티무르 왕조의 내전과 우즈베크족의 침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에서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치다가 1504년, 카불을 점령했다. 바부르는 이후에도중앙아시아, 특히 사마르칸트에 대한 재진출을 시도했으나, 우즈베크인들에게 패배해 번번이 실패했다.
악바르 1세 (1542~1605, 재위 1556~1605). 흔히 악바르 대제라고 부른다. 하지만 무굴은 바로 이 대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열세 살에 즉위해 근 50년간을 재위한 3대 황제인 악바르 대제가 명군이었기 때문이다.[12]
악바르 대제의 뒤를 이은 4대 자한기르 역시 수완가였다. 자한기르는 무굴 제국의 황제들 중 처음으로 인도 귀족의 어머니를 두었고, 인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티무르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인식하고 있었다.[22] 하지만 자한기르의 시대에 시크교와 무굴 제국 정부의 사이가 나빠졌다. 시크교가 자한기르의 장남이 반란을 일으키게 획책했기 때문이다.
결국 샤 자한은 타지마할 축조로 인해 민심을 잃은 것을 빌미로 마흔 살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 유폐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아우랑제브 역시 뭄타즈 마할의 셋째 아들이었지만 사실 어머니 장례식한다고 백성들 등골 빼먹는 격이니 나름대로 쿠데타의 명분은 있었다.
아우랑제브가 후사를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세 명의 아들들이 서로 황위를 차지하려 다투다가인도판 왕자의 난 그 중에서 둘째 아들인 알람이 형제들을 몰아내고 바하두르 샤 1세(Bahadur shah I)로 즉위한다. 바하두르 샤 1세는 아버지의 병크로 인해 터진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그는 마라타 동맹과 라지푸트의 저항을 잠시 잠재우고 시크교도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등 무굴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무굴제국 문화
무굴 제국 시기 인도의 문화는 다양한 방면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대에 형성된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은 오늘날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부분에 있어 무굴 제국 시대는 이전 굽타왕조 이후 북인도 문화의 제 2의 정통 시대라 볼 수가 있다. 이 시대의 문화적 특성은 전통의 힌두교 문화와 튀르크 – 페르시아 문화의 융합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마르칸트에 있던 티무르의 후손들의 궁전은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였는데, 이러한 문화적 배경에서 자라온 바부르는 인도에 정착한 후 당시 다양한 인종과 신앙 속에서 제각기 발전해 온 인도 문화를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새롭게 정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무굴 제국민들은 건축분야에서 아주 돋보였는데, 그들은 수많은 성과 왕궁, 문, 공공건물, 모스크, 저수 탱크 등을 세운다. 바부르는 특히나 정원을 좋아하여 아그라와 라호르 지역에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악바르는 자신의 라지푸트족 출신의 후궁들을 위하여 구자라트 양식을 도입하기도 하고 페르시아의 양식을 본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양식은 후에 무굴 제국의 중요한 건축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샤자한 때에는 섬세한 힌두 장식과 조형미가 더해져서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이슬람 건축물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중 대표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나 타지마할이다. 하지만 위에 샤자한 항목에서도 나와 있듯이 이는 무척이나 돈이 많이 들어가기도 했거니와 백성들의 피로감도 상당하다는 부정적 모습들도 보여졌다. 자한기르와 샤 자한 시기에는 이러한 건축물들 말고도 다른 부분에서도 두각을 보였는데, 이들은 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에 관심이 많았고 덕분에 많은 문학작품들과 역사서 또한 페르시아어로 기록되는 일이 많았다.
그 외 산스크리트어와 같은 힌두 작품들도 이들 언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페르시아의 천문학과 철학을 받아들여 무굴 제국 내의 학문과 접합시키기도 하였다. 이 외에 예술 분야, 의복, 예절 등에서도 페르시아의 것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 시기의 공예품들은 일반적인 백성들과는 거리가 먼 상류층들의 사치품들이 발달해 나갔다. 주로 금, 은, 보석 등으로 장식한 무기와 장신구, 섬세한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그릇 등이 대표적이다. 질 좋고 화려한 비단과 벵골 지방의 고급 면직물도 이들의 사치품이었다. 음악에서도 음의 높낮이와 빠르기가 강조되었는데, 인도의 전통악기로 알려져 있는 시타르와 타블라도 이것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의복으로는 페르시아의 스카프, 파자마 등이 유행하였으며, 인도의 전통음식들과 서아시아의 음식들이 어우러진 새로운 형태의 음식들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8일차 1월14일(일) ( 아그라 --> 델리 )
아침 6시에 기상, 7시 아침공양, 8시 델리로 6시간 이동 , 델리공항 출국 수속 , 19시40분 비행기
아침 6시에 인천 도착 , 6시42분 동대구발 K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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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스님, 직지사 불교대학원 여러분들, 그리고 대휴사 신도 여러분들 정말 특별한 인연이 되어 인도 불교성지 순례를 같이 하게 되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 기도드리고 하는데 방해나 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축원 해드릴려고 애쓰시는 모습이나 , 같이 여행간 사람들은 서로서로 챙겨 주시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습니다. 모두 성불을 이룬 듯 합니다. 귀국 후 모두들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
중간에 편찬하시던 할머니 그리고 부회장님 또 모든 다른 분들 모두 염려가 됩니다 .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만나 뵙게 되면 반가워 인사드리겠습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