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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3.12.14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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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타계 … 전 세계 추모 “최고의 위인”
○‥영결식 엄수, 사상 최대 규모로 치러져 … 각국 전현직 정상 100여명 참석


남아프리카 공화국 민주화의 상징인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지난 5일(목)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10일(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금세기 최대 규모로 치러졌는데, 이 자리에는 세계 각국 대통령과 총리, 왕과 여왕 등 전현직 정상 100여명이 참석해 웬만한 다국적 정상회담을 압도했다.

각지에서 몰려온 추모객은 9만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FNB 월드컵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이들이 국가와 종교, 종파 등 각종 이해관계를 떠나 나란히 앉은 모습은 생전에 화해와 평화를 추구한 만델라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행사장 입장은 오전 6시부터 시작됐다. 추모식 시작 5시간 전이었다. 추모 인파는 동트기 전부터 FNB 경기장 주변에 운집해 있었다.
 
이들은 경기장으로 들어가며 춤을 추고 손뼉을 쳤다. ‘만델라 영원하라(Mandela Forever)’라는 문구가 적힌 옷이나 남아공 국기를 몸에 두른 사람도 있었으며, 일부는 남아공 줄루족 언어로 “만델라는 잠들지 않았다. 기도하고 있을 뿐”이라고 노래했다.

이날 새벽부터 내린 비는 행사 때까지 이어졌다. 메마른 아프리카에서 비는 축복을 의미한다. 실제로 필라니 은데벨레(27)란 이름의 흑인 청년은 “아프리카에서 비는 축복을 의미한다”며 “위대한 만델라 덕분에 비가 오는 것”이라고 활짝 웃었다.
 
그는 이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3시간을 걸어왔다고 했다.

또 시흘레 줄루(30)라는 이름의 흑인 남성은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게 영업을 하루 그만뒀다고 말했다. 그는 “27년을 옥살이한 만델라에게 비하면 하루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추모식은 오전 11시 남아공 국가 합창으로 시작됐다. FNB 경기장은 만델라가 2010년 월드컵 폐막식 때 생전 마지막으로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낸 장소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을 시작으로 각국 정상의 추도연설이 이어졌다. 반 총장은 “남아공의 민주주의는 남아공만을 위한 승리가 아니라 같은 이상을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연단에 오를 때 추모객들은 그 어느 때보다 환호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이 젊은 시절 만델라에게 받은 영향을 언급하며 만델라를 ‘역사의 거인’이라고 칭송했다. 그는 “내가 만델라에게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그는 언제나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도록 만든다”며 고개를 숙였고, 이와 더불어 “만델라의 신념을 이어받아 전 세계가 불평등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헌사하기에 앞서 연단에 오를 때 라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도 목격됐다. 오랜 앙숙관계인 양국 정상이 손을 맞잡은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이에 세계 언론들은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평생을 바친 만델라가 세상을 떠나면서도 용서와 화해의 장을 마련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남아공 정부는 전날 성명에서 91개국 수반과 10명의 전직 정상이 추모행사에 참석한다고 전했다. 이는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장례식에 참석한 각국 정상 80여명을 크게 웃도는 인원이다.
 
미국에서는 살아 있는 전현직 대통령 5명 중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을 제외한 4명이 참석했다. 차기 대권주자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남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동행했다.

또 만델라가 1960년대부터 살았던 소웨토의 옛집 앞에 모인 시민들은 만델라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그의 삶을 기념하고 축하했다. 추모객들은 “슬퍼할 이유가 없다”며 “우리는 만델라의 삶을 축하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오랫동안 투병을 해왔고 지난 6월 한 차례 위독한 고비를 넘긴 까닭에 만델라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해온 국민들은 만델라가 영원한 휴식에 들어가자 안도와 함께 그의 삶을 축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권운동가가 된 남아공 부족 소년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목) 남아공 이스턴 케이프 주 트란스케이의 시골마을 음베조에서 태어났다. ‘롤리흘라흘라 만델라(Rolihlahla Mandela)’는 템부족 추장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난 만델라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붙여준 ‘롤리흘라흘라’는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는 뜻으로, ‘말썽꾸러기’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만델라는 후에 기독교 계통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은사로부터 ‘넬슨(Nelson)’이라는 서양식 이름을 얻게 된다. 남아공의 제2대 부족인 코사족에 속하는 템부부족의 마디바 가문 출생인 그는 음베조 마을의 족장이던 아버지 헨리 음가들라 만델라가 9세 때인 1927년 사망하자 템부족 왕을 후견인으로 해서 교육을 받게 된다.
 
나중에 남아공 국민은 만델라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가문 이름을 따 ‘마디바’로 부르곤 했다.
만델라는 템부족 왕실이 있는 음케케즈웨니로 옮겨 당시 흑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초등학교와 중고교를 졸업하고 포트헤어 대학에 진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러나 재학 당시 불평등에 항의하는 학생운동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정학을 맞자 자퇴했고, 그 일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바뀌었다.

음케케즈웨니로 돌아온 만델라는 부족에서 중매결혼을 시키려고 하자 이를 피해 무작정 요하네스버그로 상경했다. 법률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방송통신 대학인 남아공 대학 학사과정을 이수했다. 이 과정에서 만델라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등 흑인 지식층과 친분을 쌓으며 백인정권의 흑인 차별정책에 눈을 떠 민주화 투쟁을 시작했다.

25세 때인 1943년 당시 민주화 투쟁의 중심인 ‘아프리카 민족회의’에 가담했고 이듬해인 1944년에는 회의 내 청년동맹을 결성했다.
 
34세 때인 1952년에는 변호사 자격을 획득해 또 다른 민주화 운동 지도자 올리버 탐보와 함께 남아공 최초의 흑인 법률사무소를 설립했다.

만델라가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중심인물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한 것은 1952년에 있었던 전국적 저항운동이었다. 그는 당국의 차별조치에 맞서 전 국민이 궐기하는 ‘불복종 운동’의 책임을 맡아 전국을 돌며 치밀하게 지지자를 확보, 수개월에 걸친 저항운동을 벌였으며 처음으로 당국에 체포됐다.

이 저항운동으로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소규모 결사조직에서 전국적으로 10만명의 회원을 지닌 강력한 조직으로 거듭 태어났다. 그러나 백인정권의 탄압정책은 더욱 강경해져 1960년 3월 요하네스버그 인근 샤퍼빌에서 경찰이 시위대에게 발포해 69명이 사망하는 ‘샤퍼빌 대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만델라는 비폭력 저항운동으로선 민주화를 이룰 수 없다며 1961년 지하 무장조직인 ‘움콘토 위 시즈웨(민족의 창)’을 만들어 무장투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다 1962년 사보타지(고의적인 사유재산 파괴나 태업 등을 통한 노동자의 쟁의행위)로 기소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수감됐으며, 1964년 다시 반역죄로 종신형을 받았다. 그는 이후 27년간이나 철창 신세를 지게 된다.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다
 
남아공 정권이 그의 인권운동 노력을 외면했다 하더라도 남아공 국민과 세계는 그를 알아봤다. 그는 옥중에서 1979년 자와할랄 네루상,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르 국제상을 받았다.

1980년대엔 전 세계적으로 만델라 석방운동이 전개됐다. 1982년 런던 웸블리 경기장엔 7만 2000여 명이 모여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라”는 노래를 불렀고, 이 화면은 전 세계로 생중계돼 큰 반향을 불렀다.
 
이후 국제사회의 압력이 거세지자 남아공 정부는 결국 1990년 2월 만델라를 풀어줘야 했다.

만델라는 출감 후 곧 젊은 시절 가입했던 아프리카 민족회의 부의장이 돼 남아공 백인정부와의 평화협상을 주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1년 9월 ‘민족 평화협정(National Peace Accord)’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말 그대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내용이다. 이후 만델라는 1993년 인종차별을 없애는 민주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만델라는 1994년 드디어 남아공 최초의 민주투표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인구 중 흑인비율이 80%에 가까운 남아공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순간으로, 수십년에 걸친 투쟁의 결과였다.
 
그는 재임 5년간 새 헌법을 만들고 ‘진실 화해 위원회’를 발족해 지난 정권의 극악무도한 인권유린 사태를 조사하는데 힘썼다.

토지개혁과 빈곤퇴치, 건강보험 확대에도 애썼으며 전 세계에 평화 메시지를 전달하고 ‘화합’이란 남아공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만델라는 한 차례 임기를 마친 뒤 주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199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2004년 공식적으로 은퇴하기 전까지 만델라는 최고위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세계 각지에 평화를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이후 에이즈 예방 캠페인을 진행했으며 콩고 민주공화국 내전 당시에는 평화회담을 이끌었다.

지난 2001년 전립선암 진단을 받기도 했던 만델라는 그러나 고령으로 점차 쇠약해지면서 2004년 모든 공식활동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남아공의 정신적 대통령이자 ‘살아있는 성인’으로 존경받아왔다.

남아공이 2010년 월드컵을 개최할 당시 월드컵 유치에 지대한 공헌을 한 그가 과연 월드컵 기간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미 92세의 고령인 그는 당시 폐막식에 부인 그라사 마셸 여사와 함께 골프카트를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퇴장하기까지 수만명의 사람들이 ‘마디바’를 연호하고 부부젤라를 불면서 그에 대한 극진한 애정과 존경심을 표시했다.

하지만 워낙 고령인 만델라는 호흡기 질환으로 병원을 찾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그는 27년의 옥살이 기간중 약 13년을 채석장에서 노역했는데, 이 때문에 폐결핵을 앓기도 했다.
 

“인종차별 철폐는 성공, 경제정책은 실패”
 
한편 만델라의 인종차별 철폐 성공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으로서 그의 경제정책은 실패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흑인들의 인권향상과 민주화에는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남아공 경제 살리기에는 사실상 실패했다는 것이다.
 
만델라는 1994년 집권 초기부터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을 추진했다. 시장경제 질서를 유지하되 정부의 역할을 강화한 것이다. 덕분에 1980년부터 1994년까지 평균 성장률 1.5%에 불과하던 남아공 경제는 집권 초 4% 대의 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남아공의 경제 성장률은 다시 꺾였다. 1998년 이후에는 2% 이하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만델라 집권 1994년부터 1999년까지의 평균 경제 성장률을 계산하면 1.4%에 불과하다. 1980년대 수준으로 회귀한 셈이다.

이후에도 경제 성장률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금융위기 전인 2007년에는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7%를 웃도는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2012년 이후 경제 성장률은 2%대로 곤두박질쳤다.

만델라는 집권기간 동안 인종차별 정책을 철폐하고 낙후됐던 흑인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주력했고, 이는 백인 기득권의 약화를 불러왔지만, 경제권을 장악했던 백인들이 남아공을 이탈하면서 일자리 부족과 투자감소로 이어졌다.

만델라 정부는 1996년부터 일자리 창출 정책을 펼쳤지만 때는 이미 늦어 1995년 15.6%였던 실업률은 2000년에 25.6%까지 도달했다. 이후 남아공의 실업률은 25~30%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현재 야당인 민주동맹은 여당이자 만델라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경제정책 실패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민주동맹은 만델라가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킨 공로는 크지만 경제 살리기에는 실패했다며 빈부격차와 사회불안이 더욱 커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7월 18일 만델라의 날 ‘67분간 봉사’
 
“피부색깔이나 가정환경, 종교 등의 이유로 다른 사람을 증오하도록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이 증오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증오를 배운다면 사랑도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증오보다 사람의 본성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함이란 감춰져 있지만 결코 꺾이지 않는 불꽃이다.”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1995년 출간된 자서전 ‘자유를 향한 여정’에 남긴 말이다. 자유와 평화에 대한 강한 의지, 그리고 인생에 대한 강한 소신이 담겨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델라는 국제사회에서도 매우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는 지난 2006년 11월 남아공의 일간신문 ‘프리토리아 뉴스’에 기고한 글에서 만델라에 대해 “우리시대 생존인물 중 최고 위인”이라고 말한 뒤 “만델라의 위대함은 증오하기를 거부하고 다인종 국가인 남아공을 탄생시킨 것”이라며 남아공이 유혈사태 없이 평화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점을 극찬했다.

UN은 지난 2009년 11월 만델라가 태어난 7월 18일을 ‘만델라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만델라가 67년 동안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정신을 기려 이날 만큼은 세계 만인이 하루 중 67분을 할애해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자는 취지다.
Weeple 한민족네트워크 기자 www.weeple.net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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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민주화의 상징 ‘넬슨 만델라’ 타계 “우리시대 큰 별이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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