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 갈항사지 찾아서
보물 제245호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24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김천시 남면 오봉리 마을 깊숙이 자리에 위치한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을 찾아가보자.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가다보면 보호수로 지정된 453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보이고,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전각 우측에 알루미늄 창살에 보호되고 있는 석불상이 보인다. 지권인(智拳印)의 손 모양을 보자면 비로자나불이 분명하다. 불두가 떨어져 나가 새로 보수한 흔적이 보이며 불신들도 몇 조각으로 분해돼있던 것을 복구한 것으로 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인다.
전각이 닫혀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열어보니 코가 닳은 석불상이 눈앞에 마주하고 있다. 눈은 반쯤 내리감고 인자한 모습으로 바라보는 보물 제245호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이다.
갈항사지 석조여래좌상은 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된 갈항사(葛項寺)의 금당 뒤에 있던 여래좌상으로 현재 절터만 남아 있으며 불상은 보호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둥근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눈·코·입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 가슴이 발달하였고 허리가 잘록하며,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굴곡있는 신체에 밀착되어 부드러운 옷주름 선을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아래를 가리키고 있지만, 오른 손목과 손등 뿐이며 왼손도 일부 파손됐다. 양 손과 하반신 일부가 손상되었지만 형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불상의 받침대는 위로 향한 연꽃이 새겨진 상대석만 남아있고, 중. 하대석과 불상 뒤 원광인 광배(光背)는 유실되었다. 전반적으로 온화하면서도 세련미가 있는 8세기 중엽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금당 앞에 세워져있던 국보 제99호 삼층석탑은 1916년 일본인들에 의해 서울 총독부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가 지금은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놓았다. 동탑의 기단부에는 “경덕왕 17년(758년) 원성왕의 생모인 박씨와 원성왕의 이모 그리고 외삼촌 언적 3인의 발원으로 탑을 세웠다” 고 기록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석탑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균형적인 비례가 안정된 조화를 이루고 있으나 동탑은 상륜부, 서탑은 3층 지붕돌과 상륜부가 사라지고 없다. 이두문의 명문으로 조성연대가 새겨진 유일한 사례로서 김천 지방에 신라왕실의 지원을 받은 원찰(願刹)이 있었음이 입증되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절터 위쪽에는 옛 절의 이름을 그때로 딴 갈항사라는 절이 있는데 스님은 없고 스피커로 불경소리만 울리고 있다. 절을 관리하시는 할머니 한분이 반갑게 길손을 맞이한다.
할머니께서는, 올라오는 산길이 잡초가 무성해 인부를 고용해서 주변정리를 했다고 하시면서, 국가가 지정한 보물이 있으면 김천시나 관계부서가 한번이라도 와서 도움주거나 관리하는 사람도 없다며 이젠 몸도 마음도 지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