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04-19(금)

인도 불교성지 순례 답사기 [법진 이상호] Ⅳ

5일차 1월11일(목) (바이샬리--> 케사리아-->쿠시나가라-->국경-->룸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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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8.01.2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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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4시에 기상, 5시 아침공양, 6시 사리탑, 대림정사 , 쿠시나가르로 4시간반 이동

가는중간에 케사리아에서 발우탑, 쿠시나가르, 다비장 순례, 네팔로 5시간 이동 룸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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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사리탑

부처님 당시 여덟 나라 사람들 가운데 릿챠비족들이 분배받아 와 세운 사리탑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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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8탑의 하나로 바이살리 왓지국의 왕이 부처님의 사리를 분배 받아 세운 것이다. 1958년알테카르가 발국을 하였을 때, 기단부에 부처님 유골사리가 아닌, 유골가루사리가 발견되었다. 이탑의 발굴을 통하여 근본 8탑에 대한 경전 내용이 사실과 합치되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발굴과정에서 3번에 걸쳐 덧지어 졌음이 밝혀졌다. 처음 탑이 조성된 후 250년이 지나서 아소까왕이 근본 8탑을 열어 사리를 나눌 때 처음 덧지어 지고, 그 후 2차례에 걸쳐 증축된 것으로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지금은 기단부만 남아 있으며, 발굴된 유물은 빠뜨나 박물관에 특별전시시에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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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탑 내부 모습

전날 가려다가 문이 닫혀서 못 가고 오늘 새벽 6시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가 입장하였다

새벽 안개비는 자욱하고 세상은 고요하여 성스러움이 더 하다

진신사리탑으로 알려진 이 사리탑은 본체는 다 붕괴되고 흔적만 남아있는데 그 위에 돔 형태의 슬래트 지붕을 얹었다 . 일행 모두 탑돌이를 하고 아침 기도를 하는데 안개와 지붕아래의 울림소리로 잔잔한 기도소리가 너무나 신비롭다. 오늘따라 법성 스님의 염불소리가 너무 듣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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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대림정사터, 원숭이 연못, 아쇼카왕 석주

우리일행은 오후에 바이샬리 대림정사에 도착 했다

대림정사는 부처님께서 열반의 땅 쿠시나가르로 가시기전 쉬었다가 가신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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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샬리(Vaishali)대림정사 아난다존자 사리탑과 아쇼카석주

이윽고 바이샬리(구 비야리성) 근교 벨루바 마을에 도착한 붓다는 제자들과 함께 우안거(雨安居)에 들어간다. 당시는 엄청난 더위와 습도의 계절이었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붓다는 병이 났으나 오래가지 않아 회복한다. 이때 아난다가 묻는다. “세존께서 병이 위중해 몸이 야위었을 때 저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아직 승가에 대해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고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뒤에야 안심이 들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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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다는 열반에 들기 전에 교단을 계승할 사람을 지명해 달라는 뜻이었지만, 붓다는 그러한 생각을 경책했다. “아난다여, 그 기대는 잘못된 것이구나. 나는 내가 이 교단의 지도자라든가, 비구들은 모두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든가 하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이 교단의 후계자를 지명해야 되겠느냐.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는 사람이야말로 우리 교단 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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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에게 부여된 생의 불꽃이 거의 소진될 무렵, 등창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그에게 악마가 찾아와 “하루빨리 열반에 들라.”고 재촉했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악마여, 여래는 스스로 때를 알고 있으니, 물러가라. 지금으로부터 석 달이 지나 나의 본생지 쿠시나가르의 사라쌍수(紗羅雙樹) 사이에서 열반에 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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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제자에게도 자신의 운명을 알렸다. “아난다야. 내 나이 80에 들어 형상이 썩은 수레와 같으니 이제 더 굳고 강하기를 바랄 수 없다. 아난다야, 너는 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自燈明” “法燈明“ 대승투어에서 나누어준 우리 명찰에도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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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자신의 등불이라고 의지할 것도 없으며, 불법도 모르는데 어디에 의지해야 하나?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전까지 그리고 지금도 이 화두를 계속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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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비하르주(州)의 주도(州都)인 파트나(Patna) 북쪽 겐지스강 중류에 위치한 바이샬리는 전형적인 빈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불교의 8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 붓다와 기녀(妓女) 암바팔리 여인의 사연이 담긴 곳이고, 붓다가 최초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한 곳이다. 또한 원숭이 떼가 붓다의 발우에다 꿀을 공양한 곳이요, 초기 대승경전인 ‘유마경(維摩經)’의 무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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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바팔리는 누군가가 망고나무 숲에 버린 아이였다. 그러나 예쁘고 매력이 넘쳐 커서 궁중의 창부가 된다. 그녀는 착한 성품으로 자선활동을 많이 했는데, 이 소문이 마가다국 빔비사리 왕에게까지 알려져 그녀를 찾아간 왕은 암바팔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결국 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두게 된다. 이 무렵 붓다가 바이샬리를 지나며 암바팔리의 망고 숲에 머물게 됐는데, 붓다의 설법을 듣고 감동을 받은 암바팔리가 자기 소유의 망고나무 숲을 승단에 보시한 것이다. 이것이 사원으로도 불리는 암라수원(菴羅樹園)의 유래가 된다. 그녀의 아들은 훗날 스님이 되었는데, 아라한을 이룬 아들의 설법을 듣고 암바팔리는 노년에 비구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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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성도 후 6년째 되던 해 카필라성에서 아버지 숫도다나왕의 장례식을 치른 후 승단으로 돌아오려는데, 자신을 키워준 이모가 출가를 간청했지만, 전통상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이모가 궁중에서 500명의 여인을 데리고 찾아와 간곡히 사정하자 어쩔 수 없이 이들의 출가를 허락한다. 이것이 최초 비구니 승단이 탄생한 배경이다. 당시 인도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아쇼카 석주 남쪽 약 2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연못, 이 연못은 원숭이 떼가 부처님께서 목욕하시도록 판 연못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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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당시 바이샬리는 상업이 발달하여 살기가 넉넉하여, 부처님과 스님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탁발하지 않았다. 발우를 어느 지역에 한 줄로 놓아두면 신도들이 음식을 가지고 와서 담아 주었다고 한다. 어느 날 부처님이 자신의 발우를 제자들 발우에 섞어 놓았는데, 원숭이가 그 많은 발우들 중에서 부처님 발우를 골라내어 근처 나무에 올라 꿀을 따서 올렸고 한다. 이 원왕봉밀(猿王奉蜜)의 이야기는 인도의 모든 불교미술 작품에 두루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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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연못

일정이 바빠서 가까이 가보지는 못하고 차 안에서 촬영

아소카왕 석주는 대략 15미터가 넘는 높이로 그 위에는 동물상들이 올려져 있고 석주 아랫부분에는 왕의 칙령이 명문(銘文)으로 남아있다. 인도 전역에 있는 아쇼카석주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되고 있고, 맨 위의 사자상은 부처님의 열반지 쿠시나가라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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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발우탑 (케사리아 스투파 kesariya Stupa) 

쿠시나가르를 향해 가는 도로 오른쪽으로 평지 한 가운데 작은 산처럼 솟은 부처님의 발우를 묻었다는 발우탑이 보인다. 부처님은 대열반의 여정에서 바이살리 근교 벨루바(Beluva) 마을에서 마지막 안거를 나셨다. 그리고 부처님은 이곳을 떠나 쿠시나가르를 향했다. 구법승 현장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은 리차비족 사람들에게 설법을 마치고 그들과 헤어질 때 수많은 리차비(Lichavi)족 사람들이 부처님을 따라 나섰고, 성의 서북쪽 50~60리 되는 지점에 부처님이 그들을 돌려보내시면서 부처님이 사용하시던 발우를 남기셨고 그들과의 마지막 작별의 장소에 세워진 스투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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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바이살리에서 40km 이상 떨어진 케사리아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벽돌로 평지 위에 쌓은 가장 큰 대형 스투파이라고 한다. 재 5층까지 발굴하였지만 더 발굴하면 기단까지 합하면 9층 탑이라고 한다. 탑 높이는 52미터로서 인도네시아 보르도보루 탑보다 높다고 한다. 스투파의 절반은 발굴을 통해 그 전모가 드러나 있으며, 절반은 아직 발굴하지 않은 자연 상태로 남아 있으며. 이 대형 스투파의 각 층에는 과거 수행자들의 수행의 공간으로 짐작되는 작은 감실이 있고, 그 감실마다 부처님 좌상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부처님 좌상들은 목이 날아가는 등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아마 우상 숭배를 금하는 이슬람교가 인도 땅으로 밀려오면서 생긴 불상 훼손의 결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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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다비당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1주일 뒤 그의 시신은 쿠시나가라 바로 여기에서 '말라'족에 의해 화장되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포함한 유물을 놓고서 '말라'족과 '마가다' '베살리' '카필라바스투'와 같은 몇몇 왕국 지도자들의 사절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은 '도나(Dana)'라는 나이 든 사문이었던 '브라만'에 의해서 해결되었다. 그는 평화를 설파했던 분의 유물을 놓고서는 싸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합의를 통해 유물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8부분으로 나뉘었다. 그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그 유물을 안치하고서 '석가모니'의 유덕(遺德)을 경모(敬慕)하는 구조물을 세웠는데, 이것이 '스투파(stupa)' , 즉 불탑(佛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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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당에서 기도 모습

왠지 마음이 무겁고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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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열반 후 사리를 여덟개 나라에 분배하여 근본8탑이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밧지국이 8등분한 사리를 봉안하고 사리탑을 건립한곳이며 지금은 이렇게 터만 남아있다. 아쇼카왕때 사리를 수습하여 인도전역에 84,000(팔만사천여)개의 탑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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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열반당

부처님께 가사 공양을 드리기 위해 열반당으로 들어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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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 가사를 새로 입혀드리는 장면 

열반당에 들어서 누워 계시는 부처님을 뵙는 순간 눈에 눈물이 핑 돌며 가슴이 먹먹해 짐을 참을 수가 없다. 세 바퀴를 돌고 부처님 발쪽에 서서 부처님의 발을 만지고 도 만지고 연신 만져 본다. 그럴수록 눈물은 더 괴고 가슴이 먹먹타 못해 아파 오는 것을 느낀다. 가섭존자께서 부처님의 발을 들어 올리실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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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법사 역시 이 열반지를 묘사하면서 마지막 공양을 올린 '춘다'의 집 우물에 맑은 물이 흐르는 등 등을 확인하고 다음과 같이 사라나무를 그려내고 있다. "성의 서북쪽으로 3리 정도 가서 강을 건너 서쪽으로 조금 가면 사라 숲에 이른다. 그 나무는 떡갈나무 비슷한데 거죽이 푸르죽죽하고 잎은 윤기가 있다. 이곳에 특별히 4개의 나무가 있는데 바로 여래가 열반에 든 곳이다. 벽돌로 만든 큰 정사 안에 여래의 열반상이 있는.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누워있는 형상이다. 옆에 아쇼카의 스투파가 있다. 기단을 허물어져 기울고 있으나 높이는 아직도 2백여 척이 된다. 앞에 돌기둥이 세워져 있고 여래가 열반한 사적이 적혀있는데 글은 있으나 날짜는 적혀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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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 붓다의 입멸의 직접적인 원인은, 오늘날의 용어로 치자면, 일종의 '식중독'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랫동안 여래에게 공양할 기회를 기다려 온 보석공 '춘다'는 돼지우리간에서 자생하는 일종의 버섯을 요리하여 정성스럽게 올렸는데, 이 때 여래는 감지하시고도 제자들은 먹지 못하게 하고 이를 혼자만 드셨다고 한다. 감지하신 걸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음식이 다 준비된 상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춘다여, 이 음식은 나에게 공양하고 다른 비구들에게는 공양하지 말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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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피를 토하는 설사병을 얻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예정된 여행은 계속하여 '쿠시나가르' 동산에 도착하자 '사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깔고 머리는 북쪽에 두고 얼굴은 서쪽으로 하여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모로 누워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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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는 80세의 노령에 이를 때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45년 동안의 전도 여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노령을 극복할 수 없음을 안 '석가모니'는 생애의 종말이 다가옴을 느끼고서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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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그라하를 떠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 쪽을 향해 최후의 여행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교단의 질서에 관한 지침을 남겨주기를 바라는 '아난'에게 '석존'은 이제까지 남김없이 법을 설해왔으며, '스스의 꽉 쥔 주먹'처럼 감추어둔 진리는 없음을 밝히고, 유명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유훈을 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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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아, 너 스스로 너의 섬으로 삼고, 또 그 누구도 아닌 저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서 살아라. 법을 너의 섬으로 삼고, 법을 너의 의지처로 삼아라. 그 밖의 어느 것도 너의 의지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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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최후를 기록한 경전의 묘사는 특히 인상적이다. '쿠시나가르'에 도착한 '석가모니'는 "나를 위해 2그루의 '살라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으로 향하게 누울 자리를 깔아달라. '아난'아, 나는 피곤하다. 옆으로 눕고 싶다."고 말하고 , 옆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했다. 특히 그는 슬픔에 싸여 울고 있는 '아난'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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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아, 울지 말아라. 이별이란 우리에게 가깝고 수종한 것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내가 이미 네게 말하지 않았더냐. 태어나고, 생겨나고, 조건 지워진 것은 무엇이나 그 자체 안에 사멸(死滅)할 성질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 않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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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석가모니'를 친견하기 위해 찾아온 '수바다'라는 이름의 고행자가 '석가모니'의 안녕을 걱정하는 '아난'으로부터 거절당하는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석가모니는 그 고행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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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는 '석가모니'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임종이 다가오자 '석가모니'는 비구들에게 명확히 알고자 원하는 의심이나 질문이 있다면 물으라고 3번이나 말했다. 그들이 모두 침묵을 지키자 '석가모니'는 비구들에게 "그러면 비구들이여,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말하겠다. 조건 지워진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 그대들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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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그의 마지막 설법이었다. 그가 죽음에 임박해 있을 때 바로 곁에서 부축하고 있단 자가 '아난'과 '아나율'이라는 사촌동생이었던 점도 인상적이다. '석가모니'의 사후 교단(敎團)의 지도자가 되는 '가섭'이 석가모니가 임종했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쿠시나가르'로 달려온 것도 비감(悲感)이 넘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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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게 숨을 거둔 '석가모니'의 임종은 아름다웠다. 그 날을 북전(北傳)에서는 2월 15일, 남전(南傳)에서는 '베사카' 달의 보름이라 한다. '베사카'달은 인도의 달력으로는 둘 째 달이고 보름은 15일이므로 실제로는 같은 날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라쌍수 나무아래에서 열반하셨다.. 부처님께서 숨을 고르시자 사라나무에서는 일제히 하얀 꽃이 피어 주위가 온통 흰 학처럼 되었다. 그래서 그때의 나무들을 학수(鶴樹) 또는 학림(鶴林)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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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사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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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당 순례를 마치고 나오는데 어린아이들이 우리일행의 관심을 사서 돈을 좀 얻어 볼까하는 마음 으로 계속 석가모니를 외치고 있다. 어쩐지 마음이 너무 안타깝고,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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